주의. 우울함.

너무 많이 좋아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외로워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뭐라도 이게 맞나 싶고 계속 되새기면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다. 어쨌든 좋아했던 건 맞는 것 같고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한 사람을 생각하면서 지냈다. 복권 하나를 사서 긁지 않고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니면서 당첨이 되면 이 돈으로 드림카도 사고 집도 사고 보트도 사고 즐거운 상상을 하는 그런 변태같은 찌질함이다. 긁을 용기가 없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나는 마감 직전에 결국 긁었고 역시나 꽝이 나왔다. 지난 수백 일 내가 미소 짓고 잠을 자게 했던 허깨비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충격은 꽤 크다. 애초에 아무 것도 없었고 남은 건 변태 찌질이다.

언젠가 누군가를 좋아했던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좋을 것이 없다. 그렇다고 좋은데 좋아하지 않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상대방이 임자가 있었으면 애초에 쳐다도 보지 않았을 것인데 생겨버린 마음을 조각조각내서 탈탈 털어내는 것은 좋아지는 데까지 걸리는 것보다 더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열심히 노력해서 그 마음을 다 털어내고 나서 다른 누군가를 만나면 못 보고 지나쳤던 찌꺼기 한 조각 때문에 새 사람도 놓쳐 버리기 십상이다. 말하자면 미래의 아내감이 이 글을 보면 내가 두드려맞아도 할 말이 없다. 두드려 맞는 거로 끝나면 참 다행일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그만큼 신중하게 집중해서 말끔하게 털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좋아했는지 찬찬히 조심조심 되새겨보면 말끔하게 청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솔직히 내가 이 글을 왜 적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적고 싶다. 아 그래 당신은 순정남이군요 짝짝짝 여기 위로 드려요 하는 댓글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위로는 내가 억울할 때 받는 것이지 혼자 민폐 쇼 하고 받는 것이 아니다.

이모는 내가 전화를 할 때마다 누구 만나는 사람 있는지 물으신다. 이모에게 드리는 전화가 점점 뜸해지는 건 이모 잘못은 아니지만 나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서울 부산보다 더 멀리 있는 이모가 참한 아가씨를 소개시켜주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며칠 전에는 후배가 나한테 형님 이제 선 보셔야죠 하고 개소리를 했다. 속으로 지랄하네 내 주머니에는 복권이 있어 인마 하고 생각은 했지만 말은 안 했다. 말이야 쉽지 나도 존나 노력은 하고 있다. 나는 날 때부터 모자라서 당신들보다 힘든 거다. 그나마 내 상황을 잘 아는 방짝지도 한 번은 부모님한테 얘기해서 선을 보는 게 어떠냐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선은 무슨. 부모님한테 선 부탁하는게 가당키나 하냐 하니까 바로 짝지도 이해했다. 그렇다고 주변에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괜찮은 여자가 없는 게 아니고 여자가 없는 거다.

아 옛날 이야기. 어디에도 하지 않았던 얘기. 당연히 가족들도 모르고 방짝지에게도 하지 않은 얘기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런 얘기를 인터넷에 흘리는 나도 참 병신같지만 해야겠다. 내가 많이 좋아하던 전 여친이 있다. 당연히 전 여친 중에 많이 좋아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아무튼 그 중 한 명이겠다. 내가 힘들 때 달래 주고 위로해 주고 즐거운 추억도 많이 만들어 줬던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꽉 막힌 꼰대인지 모르고 집에 데려가서 밥도 같이 먹었다. 부모님은 당시 여친과 그 전에 만나던 사람의 학벌과 처지를 비교하며 연애를 반대했다. 결혼을 반대한게 아니다. 연애를 반대했다. 당시 나는 장학금 잘 받고 학교 잘 다니고 있었다.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 온 노인네의 철학을 내가 바꿀 수는 없다. 부모님이 반대하는 연애를 희망 없이 지속하는 것도 좌절스럽고 여러 다른 스트레스에 지쳐서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헤어졌다. 내가 왜 힘든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사람을 나에게서 떼어놨다. 헤어진 다음날 나는 부모님에게 "나중에 내가 결혼할 사람은 내가 정하고 내가 데려와서 부모님께는 통보만 할테니 그리 아세요" 라고 했다. 내가 지금까지도 가족들하고 사이가 멀고 부모님과 대화도 잘 안 하는 이유 중에 하나다. 그 때는 내가 이렇게 연애 젬병인지 몰라서 좀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말을 물릴 수도 없고 된다고 해도 내가 싫다.

윤식당에 윤여정 이서진 말고 정유미만 나왔으면 좋겠다. 정유미 보는데 이서진이 앞에서 알짱거리면서 화면 가린다. 좀 비켰으면 싶다. 정유미 너무 예쁘다. 정유미 얼굴만 하루 종일 나와도 질리지가 않을 것 같다. 정유미는 하는 짓도 착하다. 배우 성격이 실제로 착한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고등학교 졸업사진 깻잎머리 좀 충격이긴 하지만 어쨌든 화면에 착하게 나오니까 내 정유미는 착한 거다. 나에게 충분한 환상을 만들어 준 배우 정유미가 참 고맙다. 내가 짝사랑한 그 사람은 정유미를 꼭 닮았다. 내 환상 속에 있던 정유미가 현신으로 나왔다. 그것도 내가 사는 이 누추한 시골 동네에 말이다. 사람 얼굴에서 빛이 났다. 생긴 것만 천사가 아니라 사람 성격도 참 착하다. 그냥 착한 것이 아니라 똑똑하면서 다른 사람 배려도 잘 하고 예의도 바른데 착하다. 그런 사람이 어디 흔한가.

나는 내가 끓인 김치찌개를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먹는 사람을 봤다. 정유미님이 내 여친이면 어쩜 그렇게 사랑스럽게 복스럽게 먹을 수 있나 하고 말했겠지만 그 사람은 나 뿐이 아닌 모두에게 친절한 남이기 때문에 나의 인지 능력의 부적절함과 쓸모없는 왜곡된 연애 감각이 빚어낸 환영일 뿐이다. 정유미님과 나는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자동차 드라이브도 좋아하고 비슷한 음악, 비슷한 영화도 좋아한다. 게다가 말이 잘 통한다. 생각이 통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공통점이 나를 착각의 늪에 빠지게 만드는 요인이다. 정유미님은 그냥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것이지 내가 만든 김치찌개를 특별히 맛있게 먹은 게 아니다. 내가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떠 먹은 것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던 것이지 같이 나눠먹는 데에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나는 그런 사소한 모든 것을 특별히 받아들이는 비루한 금사빠다. 원래 여자들은 동성 친구들끼리도 다들 그러는 평범한 것들이다. 정유미님이 친절하고 살가운 것, 그와 내가 공통점이 많고 말이 잘 통하는 것은 내가 매력 없고 성깔 더러운 아저씨라는 사실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입장을 바꿔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혹시 나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이 글을 읽는다면 나를 꼬시는 게 얼마나 쉬운지 깨달았을 것이다. 내가 만든 맛없는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고 내가 먹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뺏어 먹으면 된다. 가끔 말하면서 손으로 툭툭 치거나 내가 잘 하는 걸 말로 칭찬하면서 빙긋 웃으면 나는 당신의 노예가 되어서 그 날부터 매일 당신만 생각하게 될 거다. 난 참 쉬운 남자다. 그래서 금사빠다. 참고로 나에게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여주는 것은 나의 호감을 얻지 못한다. 내가 김천국밥 주방 아주머니를 짝사랑하지 않는 이유와 같고,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와도 같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반대 경우를 해 봐서 안다.

나는 데이트를 했으면 하고 바랐다. 계획을 했든 우연히든 어쩌다 보니 둘이 있게 된 그런 거 말고 진짜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데이트 계획을 짜서 정유미님을 위한 멋진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죽이 돼도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데이트에서는 그냥 동네 오빠 말고 남자가 되는 거니까 그게 참 기뻤을 것 같다. 데이트 후에 사귀든 안 사귀든 나는 데이트를 했다는 것만도 황홀할 것 같았다. 착한 사람도 매력 없는 남자 사람의 데이트 신청은 거절한다는 것을 알았다. 착해서 미적거린 것일 수도 있지만 거절은 거절이고 단호하지 않은 거절도 거절이다. 생각해 보면 단호했던 것 같기도 하다. 욕을 하거나 쌀쌀맞게 하지 않는 것은 어쨌거나 내가 고마워할 일이다. 미안하지만 어쩌겠나. 나도 그런 줄은 몰랐고 용기 없고 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혼자 늙기는 싫으니 말이다. 어쨌든 정유미님은 나에게 미안할 필요가 없다. 아닌 건 아닌 거고 솔직한 건 미안할 필요가 없으니까.

나는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하트시그널을 세 번 봤다. 출연자들이 하는 사소한 행동과 말투 하나하나에 첨언을 하는 연예인 패널들이 내 눈에는 나비에 스톡스 방정식을 암산으로 풀고 있는 천재 교수처럼 보였다. 저 사람들은 출연자들의 저 미묘한 감정들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맞추는지 신기했다. 그래서 보고 또 봤다. 그리고 나같은 너드 말고 보통 사람들은 감정 표현을 어떻게 하는지 열심히 공부했다. 내가 요즘 책을 멀리하고 드라마를 많이 보는 핑계 중에 하나는 그런 눈빛과 표정 행동 말투를 읽는 능력을 키우고 싶어서이다. 보고 또 보면 처음 봤을 때 몰랐던 배우들의 감정 표현이 보인다. 아직 멀었다는게 답답한 현실이다. 나는 내가 정유미님을 좋아한다는 것을 열심히 어필했지만 공부한 효과가 나지는 않았다. 한참 멀었다. 그 사이에 나는 많이 늙을 것이다. 

그제는 아침부터 새벽까지 미드를 몰아 봤고 어제는 종일 잠만 잤다. 얼굴에 곰팡이 날 것 같아서 오늘은 밖에 좀 나갔다 왔는데 기분은 좀 괜찮아진 것 같았다가 자려니까 잠이 안 온다. 성급했을까. 성급하게 나 혼자 좋아하고 상상 키우면서 짝사랑 하다가 혼자 처박혀서 궁상 떨고 이 나이 먹고 그것도 남자가. 내가 여자라도 나랑은 못 사귀겠다. 정 떨어진다.

정유미는 이제 내 마음 속에 없다. 앞으로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어쩌다 우연히 만난다면 나에게 반갑게 인사해 줄 것이다. 원래 친절하고 착한 사람이니까. 착하고 좋은 사람은 착하고 좋은 사람 만날 것이다. 내 슬픔은 정유미 때문이 아니라 내가 금사빠이라서이다. 나중에 또 누군가 내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어 주면 혼자 설레서 짝사랑하다가 혼자 상처받고 다시 방구석에 처박힐 날이 올 거다. 근데 암만 생각해도 김치찌개 맛 없었는데 뭐지 싶다. 미각에 문제가 있는 건가.


빡션 이 작성.

 

 

 

 


당신의 의견을 작성해 주세요.

≪ Prev : 1 : 2 : 3 : 4 : 5 : ... 7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