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이 좋다는 말도 가끔 듣고 기억력이 나쁘다는 말도 가끔 듣는 편이다. 기억력이 나쁜 예를 들자면 친구 생일, 내 생일, 보고서 제출 마감일, 노트북 배터리 챙기기, 여행 갈 때 칫솔 가져가기 등등의 예가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 이름과 특징을 기억하는 것에도 기억력은 도움이 되지 않고 티비나 영화를 볼 때도 주인공 이름이나 이전 줄거리를 쉽게 까먹는다. 내 기억력 중에 그나마 좋은 부분은 그런 예에 대해서는 발휘되지 않는다.

내 기억력이 안 좋은 특이한 예를 들자면 초등학교 2학년 때 슬리퍼를 신고 학교를 간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슬리퍼를 신고 세수하고 가방 메고 나서 집 나가기 전에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는 걸 까먹고 대문을 나서서 학교까지 슬리퍼로 걸어갔다. 초 2면 누가 슬리퍼 신고 학교 오면 놀림감이 될 때였다. 쉬는 시간에 나는 그 때까지도 내가 슬리퍼를 신고 온 것을 인지를 못 한 상태로 별 생각 없이 앉아 있었는데 지나가던 이쁘장한 여자애가 날 보고 '너 오늘 슬리퍼 신고 왔어?'라고 아주 큰 목소리로 얘기를 했고 주변에서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날 열심히 울었고 처음 얘기했던 여자애는 하루 종일 나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신기하게도 기억력은 이런 곳에서 그 능력을 발휘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슬리퍼를 신고 학교에 가서 놀림을 받았던 걸 이십 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바지 입는 걸 까먹은 적은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도, 지금 생각하면 별 일 아닐 수도 있지만 당시에 내 행동, 말, 보고 들은 것이 감정과 깊게 연관된 것은 아무리 오래 지나도 HD 화질로 기억에 남아 있다. 특히나 안 좋은 감정을 느꼈을 때의 기억이 참 오래 간다. 창피함, 모멸감, 좌절감, 배신감 등을 느꼈던 때에 내 행동과 주변 사람들의 대사가 하나하나 정말 선명하다.

오늘은 이런 저런 기억들이 머릿속에 있는 날이다. 좋은 기억들도 있다. 정말 행복했던 때에 느꼈던 기억도 마찬가지로 그 순간의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태권도 사범님이 나를 잘 한다고 불러서 칭찬했을 때 정말 행복했었다. 수백 명 앞에서 칭찬을 한 다음 마이크를 주고 한 마디를 하라기에 어리버리하게 '아..... 네... 좋습니다' 라고 대답했고 모두가 빵 터졌다. 친구들이 나를 따라하며 '아 네 좋습니다ㅋㅋ' 하며 놀렸지만 재미있었다.

즐거웠던 기억이 떠올라서 이내 슬퍼지는 것도 있다. 그 기억이 이제는 더 이상 좋은 기억이 아니라 나쁜 기억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쁜 기억을 지우기 위해 회상을 하고 있다. 나쁜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는 그 기억을 차분히 들춰내고 별 일 아니었다는 것을 곰곰이 되새긴 뒤 다시 집어넣으면 된다고 한다. 그렇게 몇 번을 하면 조금씩 잊혀진다고 한다. 더 이상 돌이켜도 아프지 않을 때가 되면 그 때는 기억을 할 필요도 없는 사소한 일이 되는 것이다.


빡션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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