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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등학교 시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같은 동네 사는 고만고만한 애들이다. 누가 잘 산다고 해 봐야 큰 회사 다니는 아빠 둔 아이가 잘 사는 아이었고 못 살아봤자 다 식구들 먹을 걱정은 안 하는 집들이었다. 우리 동네는 어떤 사람이 보면 럭셔리 서울이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보면 우리 동네는 강북 게토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학교를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같이 동아리방에서 밥 먹고 술 먹고 굴러다니는 대학생들은 같은 남방을 입어도 골라골라 시장 남방과 유행 지난 아울렛 남방과 유명 브랜드 신상 남방으로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눈치가 빠르지 않고 패션에 관심도 없는 내가 그런 차이를 아는 데에는 몇 년이 걸렸지만 아마 그들만의 리그에서 자란 그 아이들은 사람을 만났을 때 시장인지 아울렛인지 명품인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이 자장면을 시켜 먹고 편의점 소주를 마시던 그들 중에는 탕수육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것에 흡족해하는 학생도 있고 서민의 삶을 체험하며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학생도 있는 것이다. 모두가 즐거웠고 행복했던 것은 공통이지만 저마다 다른 삶에서 다른 의미를 가진다.

대학생이 졸업을 하면 각자 사회의 다른 곳으로 진출해 나간다. 아버지 회사에 입사해서 경력을 조금 쌓으면 곧 경영을 시작할 수 있는 학생도 있고 일단 어디든 입사해서 돈을 모아 십 년 뒤에 치킨집을 차릴 미래를 그리는 학생도 있다. 그리고 그제서야 결혼이 남의 일이 아님을 친구 결혼식 청첩장을 통해 체감하게 된다. 이미 부모님이 우리를 낳은 그 나이는 지났다. 부모님 세대는 작은 회사 신입 사원도 결혼해서 단칸방에 사는 것이 허용되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의 집 귀한 아들 딸을 그렇게 고생시키는 것을 허락받기 쉽지 않다. 옛날 여자친구 부모님은 나에게 '공대? 우리 딸 비싼데' 라고 말했다. 애당초 부모님의 허락 이전에 서로 상대에게 하고 있는 기대를 어느 누구도 충죽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과 '현실'이라는 결혼에 그랜드 캐년만큼 괴리만 느낀다.

결혼? 집? 서울에 작은 아파트 사려면 3억? 돈 제일 많이 주는 대기업 취직해서 안 쓰고 안 먹고 몇 년을 모아야 내가 집을 살 수 있을까? 그 때쯤 마흔이 되면 그게 결혼 준비가 된 건가? 나랑 비슷한 처지들이 이런 고민을 하는 동안에 코스 요리 스테이크 나오는 강남 호텔 예식장에서 결혼하는 친구들은 너무도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호텔 결혼식이 아니더라도 20대 후반에 일찍 결혼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학생일 때 명품을 입거나, 명품을 입을 수는 있지만 검소하게 살던 사람들이었다. 30대 중후반 넘어가면 출산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빨리 결혼을 하기로 했다는 이유가 그 친구의 상황에는 현명한 선택이겠지만. 주변을 잘 살펴보자. 아예 선택권이 없는 사람들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는 충고이다. 그런 말을 듣는 순간 나같은 사람과 그가 같이 동아리방에서 술 먹고 뒹굴던 옛날 모습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기막힌 추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친구는 결혼을 과연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나와 정말 다른 고민을 하는구나. 내가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고민을 하고 내가 가지지 못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은 그들 나름의 험난한 인생을 슬기롭게 살고 있는 것이겠지만 내가 보기엔 행복한 금수저들이다. 그렇다고 질투하고 시기할 수는 없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지만 착하고 인간적인 매력있는 친구들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주민증은 옛날 옛적에 받았다. 운전 면허도 있다. 술, 담배도 살 수 있다. 국가는 우리를 성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집도 차도 없고 모아놓은 현금이나 부동산이나 주식도 없는 우리는 해 뜰 때 출근해서 자정에 퇴근하는 쳇바퀴 삶을 살면서 차곡차곡 돈을 모으거나 끝도 없이 공부를 하며 다음을, 다음을, 다음을 기약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 맞는 두 성인이 만나도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결혼은 할 수 없다. 미숙한 성인은 성인이라 부르기 부끄럽다. 내가 친구를 만나 인생 푸념을 늘어놓고 들어와 밤을 새며 보고서를 쓰는 이 나이에 나를 낳은 아버지는 둘째 딸이 걸음마를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둘이 부부싸움을 하든 말이 통하지 듣지 않아 답답해하든 30대 초반 이전에 결혼을 한 사람은 결혼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축복받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항상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것은 인간이 숙명적으로 느끼는 외로움을 같이 도닥거릴 수 있다는 뜻이다. 쉽지 않은 일을 어렵지 않게 해낸 그들은 금수저이거나 용감한 사람들이다. 부모님에게 어렵지 않게 전세금 정도를 받을 수 있었던 행운을 타고난 사람들이거나, '결혼이 애들 장난이냐'는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작지만 따뜻한 집에서 살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용기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개천에서 용나는 만큼 힘들 것이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은 결혼이 계급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사랑으로 불같이 결혼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찼다. 지나간 사랑은 있었지만 내가 준비가 되었을 때 다시 돌아오게 할 수는 없다. 몇 번의 연애와 함께 몇 번의 쓰디 쓴 이별을 겪었다. 안 되는 것이 왜 안 되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꽤 얻었고 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깜깜하다. 맥주집에서 마주친 예쁜 이성은 너무 어리다고 느꼈고 매력있는 또래 이성은 이미 결혼을 했다. 세상 어딘가 아마 나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육십억 사람들 중에 삼십억이 이성이지만 나랑 말 통하는 내 또래는 얼마 안 될 것이고 그 중에 나와 만날 인연이 있는 사람은 수십명 정도일 것이고 그 중에 이미 결혼한 사람이 절반은 될 것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나머지 중에 나와 성격이나 취향이나 집안이 맞지 않는 사람, 결혼할 생각이 없는 사람을 주루룩 제외하면 손에 꼽을 만큼이 남는다. 그리고 그렇게 몇 안 되는 나의 천생연분이 만약 있더라도 내일 만날지 마흔이 돼야 만날지 언제 만날지 기약이 없다. 내가 눈이 너무 높은 것도 아닌데 나는 뭘 잘못했을까. 우리는 정말 결혼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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빡션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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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6/09/27 01:24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요즘나도 격하게 느끼고 있는 이야기

  4. 2016/09/27 01:24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결혼은 애초에 없는거였고 내몸하나라도 먹여살릴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야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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