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정신대는 일제 식민 시절 징용된 여성 공장 노동자와 성 피해자를 같이 부르는 말이었다. 90년대 이후 주로 공장 노동자를 정신대로 부르고 성 피해자를 위안부로 부르며 둘을 보다 명확히 구분해서 부르게 되었다. 정대협, 현재 정의연의 옛 이름인 정대협에 쓰인 정신대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쓰는 위안부라는 말과 같은 의도로 쓰인 말이다. 용어가 복잡한 내력을 알아야 한다.

정신대라는 이름은 원래 근로정신대이고 공장 노동자와 성 착취 피해자를 아울러서 불렀다. 당시 일제가 종군위안부도 근로정신대로 속이고 모집했던 사실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는 일제의 전쟁 성범죄는 신문에도 뉴스에도 없었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다. 일반 대중들은 전쟁 당시 부대 안에 군인들의 성욕 해소를 위해 여자들을 가둬둔 외딴 방이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들어보지도 못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그대로 말한다고 쉽게 믿어졌을 것 같지도 않다. 전쟁 성 범죄 피해자는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공장 노동 징용 피해자들에 섞여서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공식적인 직함도 없이 끌려간 사람이면 어디에 갔다 왔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하물며 그 당시에 돌아온 여성들을 보는 시선이 고왔을 리가 없다. 하루에 군인 수십명에게 강간을 당하기를 하루도 쉬지 않고 몇 년동안이나 악몽처럼 보내다 겨우 목숨은 건져 살아 돌아왔다는 자기 이야기를 쉽게 말할 수 있는 20대-30대 여성은 지금 시대라도 없을 것이다. 돌아온 여성들은 근로정신대에 끌려갔다온 것으로 처리되었고 그렇게 하는 편이 성범죄를 덮으려는 가해자의 의도대로이기도 했지만, 피해자들로서도 차라리 그렇게 불리는 것이 덜 마음 아팠을 것이다.

살아 돌아온 할머니들이 겪은 시대 상황은 지금과 많이 달라서 좋지도 않은 이야기 뭐가 자랑이라고 말하는가 하며 미래를 위해 어두운 과거는 굳이 들추지 말고 쉬쉬해야 한다는 태도가 기득권층의 주된 자세였다. 심지어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피해자에게 더럽다고 환향녀식의 욕을 하는 경우도 있는 시대였다. 피해자 할머니들은 입에 담기도 어려운 실상을 적나라하게 말하는 표현보다 정신대라는 표현으로 색안경낀 따가운 시선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야 했을 것이다. 피해자가 피해입은 사실을 숨겨야 했던 것이 전쟁 성범죄의 비극이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는 이런 인식에 변화가 생겨서 근로정신대와 성 피해자를 구분해야한다는 뜻으로 정신대라는 이름이 성 피해자에게 부적당하다는 인식이 널리 공감대가 생겼다. 정신대로 불리던 전쟁 성 범죄 피해자 할머니들을 뭐라 바꿔 불러야될지가 당시에 큰 이슈였다. 사회 각기에서 다른 이름이 후보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중 위안부라는 명칭은 피해 상황을 알기 어려운 은유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지만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 때문에 성노예와 같은 직접적인 표현을 쓰는 것은 피해 당사자 할머니들이 꺼려했다. 여러 후보 중 종군위안부에서 종군을 떼고 위안부로 불리는 것이 가장 낫다는 피해 당사자 할머니들의 의견을 당시 정대협이 수렴해서 공식적으로 한국어 명칭은 위안부로 부르게 되었다. 위안부를 직역한 영문 명칭인 comfort women도 이 때 널리 알려졌다. 그 전까지는 정대협 이름에서 보듯이 위안부라는 말이 널리 쓰이기 전 위안부 피해자를 부르는 말로 정신대라는 표현이 가장 많이 쓰인 것이다. 가끔 종군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고, 위안부라는 말 단독으로는 잘 쓰이지 않았다.

위안부라는 말은 위안을 주는 여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어딘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아마 피해자 할머니들도 덜 잔혹하게 들리는 그 어감 때문에 위안부라는 말을 골랐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강제 매춘에 가까운 성 노예제를 통한 성욕 해소가 전쟁에 지친 군인들에게 위안을 준다는 뜻이다. 전쟁 중의 일본이 아니라면 나오기 어려운 께름칙한 발상에서 위안부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나는 위안부라는 말이 어딘가 못내 아쉬운 느낌은 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성노예라고 부르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주장하기에도 머뭇거려진다. 세상 어느 여성도 당신은 성노예였습니다 라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잔인한 것은 그 말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과거의 일이었다. 말로 반복하는 것조차도 수치심과 모욕감을 주는데 실상은 얼마나 참혹했을까. 너무나도 잔인한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이 위안부라는 에두르는 말이 쓰이게 된 이유이다. 이런 비극이 또 있을까.

어느 범죄에서든 피해자가 항상 옳은 말만 하고 항상 정의로운 행동만 하고 항상 똑똑한 말만 한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보는 이의 입장에서) 착하고 진실되고 정의로운 피해자를 골라서 돕는게 아니라 그냥 피해자를 돕는 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이익을 취하려는 가해자 세력이 실제로 매국 사학자에게 연구비 명목으로 돈을 쥐어주는 것이 명명백백히 드러날 정도인 진흙탕같은 현실에서 피해자를 지켜주고 정의를 바로세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있었던 일에 주목해야 하고, 과거에 벌어진 일이 지금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2020/05/27 16:47 2020/05/27 16:47
얼음꽃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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